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1943년 [[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]]으로 미영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[[국가 파시스트당]] 내부의 반무솔리니파와 국왕 [[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]]는 [[베니토 무솔리니]]에게 전쟁 책임을 전가하고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에 합의, 무솔리니는 축출되고 육군 원수 출신인 [[피에트로 바돌리오]]가 이끈 신 행정부에 의해 전범으로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바돌리오 정부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지만, 항복 직후 바돌리오 정부를 의심하고 있던 독일이 이탈리아를 점령한 후 무솔리니를 구출[* [[오토 스코르체니]] 문서 참고.]해서 1943년 9월 23일 이탈리아 북부에 설립했다. 먼저 무솔리니는 자신을 배신했던 [[갈레아초 치아노|사위]]와 [[에밀리오 데 보노]] 등 17명을 처형한다. 자신의 사위도 처형시켰던 데서 알 수 있듯이, 군 장성도 처형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고 [[이니고 캄피오니]] 등 일부 군 장성들이 살로 공화국에 대한 협조를 거부했다가 처형당한다.--[[윈스턴 처칠]]이 그것을 보고 무솔리니를 존경했다고 한다.--[* 진짜로 존경했다는 게 아니라 처칠의 일화 중에 처칠의 사위가 처칠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보자 처칠이 무솔리니라고 대답했는데 사위가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아니냐고 되묻자, '''걔는 지 사위마저 총살시킨 놈이었다'''고(...) 말한 것이었다. 사위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한 [[블랙 코미디|농담]]일 뿐이었다.] 사실 무솔리니는 마지막에 치아노는 살려주면 안되냐고 요청했지만 그는 실권이 없었고 독일군이 죽여버렸다. 그리고 무솔리니는 군 구축과 정비의 노력들을 하였으나, 독일의 괴뢰국이었기 때문에 [[트리에스테]], [[이스트리아]], [[쥐트티롤]] 지방 등 일부 지역을 독일에 강탈당했다.[* 참고로 원래 쥐트티롤은 히틀러가 [[오스트리아 병합]]에 항의하는 무솔리니를 달래기 위해 공식적으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한 지역이었다.] 노조 활동과 파업도 금지되었으나, 무솔리니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위해 노동자의 지지를 받을수 있는 정책들이 통과하도록 추진하였다. 하지만 그래봤자 [[괴뢰국]]일 뿐 별다른 역할은 하지 못했다. 독일의 지원과 보호가 없이는 결코 존속하기 불가능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들은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고, 이탈리아의 [[레지스탕스|레시스탄자]]([[파르티지아노]]) 유격대나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[[유대인]]을 학살하는 일들에만 이용되었을 뿐이었다. 하지만 [[이탈리아 전선]]에서는 남북으로 길다란 [[이탈리아 반도]]의 지형 덕분에 [[독일 국방군]]의 알베르트 케셀링이 지휘하는 독일군은 구스타프 라인, 베른하르트 라인, 발바라 라인, 아레초 라인, 고딕 라인 등 겹겹이 늘어선 산맥 방어선들을 따라 방어전을 전개하여 남부 이탈리아 지역에 있는 연합군들을 묶어두어 전선을 유지시켜 연합군의 진격이 지지부진했기에 이 허술해 보였던 국가가 의외로 오래 버티게 되었다. 하지만 독일군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군은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막아내고 반격을 할 역량은 부족했고, 독일의 패망 직전인 [[1945년]] [[4월 25일]]에 국방장관 [[로돌포 그라치아니]]가 '이탈리아의 독일군 항복이 임박했다.'는 급보를 무솔리니에게 전하고 북부로 도망친다. 무솔리니는 즉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'독일과의 [[추축국|추축동맹]]을 파기한다.'고 알리려 했었지만, 이미 뒷북이었다. 그 날 저녁,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범 재판을 대비해 자신의 전범 혐의가 써져 있는 서류들을 챙기고 이탈리아 탈출을 시도한다. 이로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정부는 사실상 붕괴된다.[* 이탈리아는 [[4월 25일]]을 해방의 날(festa della liberazione)이라는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.] [[4월 27일]] 중립국 [[스위스]]로 탈출하려던 무솔리니와 그의 일행 6명은 [[파르티지아노]]의 검문을 받게 되어 체포, 즉결 총살을 당한다. 총살당한 무솔리니와 애인 [[클라라 페타치]]를 비롯한 그의 일행들은 이어서 밀라노 광장 주유소에 거꾸로 매달린 채 전시되었다. 이틀 뒤 독일의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(Heinrich von Vietinghoff) 장군이 카세르타에서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의 항복에 서명하자, RSI의 국방장관 그라치아니도 항복했다. 항복은 [[5월 2일]]부터 발효됨으로써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은 완전히 멸망, 도로 [[이탈리아 왕국]]에 병합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